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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복음서를 읽으면서

복음서를 읽으면서. 14. 헤로데는 누구인가?

by Eyes to the dove 2022. 10. 6.

복음서에는 복수의 헤로데가 나와 읽는 사람을 헷갈리게 한다. 아래 그림은 헤로데 대왕의 가계도를 간략히 그린 것이다.이를 바탕으로 예수 출현 전후의 이스라엘 역사를 간략히 살펴 보는 것은 복음서의 배경을 이해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이다. 

① 헤로데 대왕, 왕조의 창시자이며 성서에 나오는 유아 살해범

② 헤로데 안티파스(BCE 4–CE 39), 갈릴레아의 영주, 나중에 예수의 재판에 관여함.

③ 헤로데 아르켈라우스 (BCE 4–CE 6), 유대, 사마리아 지역의 영주, 해당 지역은 나중에 로마 총독의 직할 통치로 바뀜

④ 헤로데 필리포스, 헤로디아의 첫 남편, Tetrach(영주)도 아니었음

⑤ 헤로디아, 헤로데 필리포스와 이혼하고 그의 이복형제인 헤로데 안티파스와 결혼

⑥ 살로메, 헤로디아의 지시에 의해 춤을 추고 상으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원함. 나중에 숙부와 결혼했다고 함.

 

헤로데 대왕 이전

 

이스라엘의 역사를 대략 살펴보면 BCE 20C 정도에 아브라함이 등장하고 BCE 15C에 모세, BCE 10C 정도에 다윗이 등장한다. 이후 남북국의 분열을 거쳐 BCE 8C에 북쪽이 BCE 6C에 남쪽이 각각 앗시리아 및 바빌론에 의해 멸망하여 2000년 넘게 나라없는 민족이 된다. 디아스포라 시대이다.

 

페르시아 왕인 키루스 2세가 유대의 포로들을 해방시켜(BCE 6C) 일부 유대인들은 다시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오게 되지만 여전히 자기 나라없이 지역을 지배하던 왕조의 지배를 차례로 받게 된다. 이 때 히브리 성서의 마지막인 말라기가 기록되었다.(BCE 6~5C). 신약성서가 작성되기 까지 약 500 ~ 600년간 기록의 공백이 있는 것이다.

 

BCE 4C에 이르러 알렉산더의 마케도니아가 페르시아까지 격파하여 유대인들도 마케도니아의 지배를 받았다. 이후에는 알렉산더 대왕 후계자들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된다. 셀레우코스 왕조는 율법을 금지하고 성전을 모독하는 등 유대인을 탄합하였고 강제로 그리스화를 진행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유대 독립전쟁이 시작되고 유다 마카베오가 BCE164년에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로마에게 정복당하기 전까지 잠깐동안 독립국가의 지위를 누리게 된다. 유다 마카베오는 신전을 정화하고 유대교의 전통의례를 다시 부활시켰는데 이때 신전의 성유가 하루치밖에 없었는데 8일 동안 타오르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 기적은 유대교 주요 절기인 하누카의 기원이 된다.

 

이때의 왕조를 하스몬 왕조라 칭하며 하스몬왕조는 로마에게 정복당한 이후에도 유대 사회에서 정통성을 인정받고 영향력을 유지하였다.

 

하스몬 왕조가 에돔을 평정하였는데 이 에돔 족속 중 유력가문 출신인 안티파트토스는 에돔이 망하자 유대교로 개종해서 하스몬 왕조에 협력하였다. 구약에 따르면 에돔족속은 야곱(이스라엘)의 형이었던 에서의 후예이다. 그런데 당시 왕의 두 아들은 서로 권력 다툼을 하고 있었는데 형은 대사제장, 동생은 왕을 하기로 합의보게 되었다. 안티파트토스는 동생과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입지에 불안감을 느껴 형이 대사제장과 왕을 독차지 해야 한다고 꼬드겼고 자신의 처가 왕국에 원조 병력까지 요청하게 된다. 처가는 나바테아왕국이었는데 셀레우코스 왕조의 후손이 세운 나라로서 수도는 유적으로 유명한 페트라였다. 그러자 불안해진 둘째(왕)은 폼페이우스의 부장에게 뇌물을 바쳐 로마를 끌어들였고 이에 안티파트토스의 처가 왕국(나바테아 왕국)은 로마와 맞서기 싫어 병력을 철수시킨다.

 

이 사건은 로마의 압도적인 힘을 실감하는 계기가 되어 대사제장 형, 왕인 동생(아리스토불로스2세) 그리고 안티파르토스 모두 동방을 관장하던 폼페이우스에게 줄을 대고자 아부와 뇌물을 바치면서 환장을 하게 된다. 이에 폼페이우스는 두 형제를 중재하겠다면서 아예 유대를 정복을 하게 되고 그 때까지 서로 치고 밖던 형제는 그대로 로마에 나라를 헌납하게 된다. 이 때 안타파트토스는 폼페이우스의 신뢰를 얻어 하스몬 왕조 두 아들을 제치고 나라를 아예 차지하게 된다.

 

헤로데 대왕

 

유대의 왕이 된 안티파트토스는 첫째와 둘째 아들을 각각 일정 지역을 관할하는 행정장관으로 기용하였다. 로마에서 카이사르가 암살당할 즈음 안티파르토스도 독살을 당해 두 형제가 권력투쟁을 벌이게 되었다. 형은 아리스토불로스 2세의 후손의 봉기로 목숨을 읽게 되었고 둘째 아들이던 헤로데는 아버지가 했던 방식대로 로마의 실권자에게 협력하으로써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처음에 안토니우스에게 줄을 대다가 옥타비아누스로 줄을 갈아타고 충성을 맹세하였는데 결과적으로 줄을 잘 선택하였다) 하스몬 왕조의 후계자 왕손도 모두 제거되어 헤로데가 BCE 37에 로마로부터 유대의 왕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이 헤로데가 성경에 나오는 유아학살의 장본인이다.

 

하스몬가문은 400년 외세를 끝장낸 역사가 있기 때문에 혈통이 권위가 있었던 반면 헤로데는 하스몬 왕가의 혈통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에돔 출신인 관계로 출신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다. 때문에 이미 부인과 아들까지 있었으나 하스몬 왕조의 공주인 마리암(2째 부인)과 결혼하여 유대의 왕이 되기 위한 혈통의 정통성을 어느 정도 확보하였다.

 

헤로데는 정치적으로는 뛰어난 업적을 이루었다. 정복사업을 통해 유대의 영토를 넓혔고 솔로몬의 성전을 더 크게 재건하였으며 농업을 장려해 경제력을 향상시켰다. 그 결과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을 제외하고는 로마제국 내에서 가장 높은 정치적, 종교적인 자치권을 향유할 수 있었다. 괜히 헤로데 대왕(Herod the Great)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다.

 

정서적으로는 매우 불안하여 업적과 무관하게 폭군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왕위의 정통성을 준 왕비 마리암과 갈등 끝에 왕비를 처형하였다. 사실 마리암과는 처음에는 사이가 좋았으나 혈통의 정통성을 지니고 있던 마리암은 사실상 권력을 다투는 경쟁자의 성격도 있었기 때문이다. 마리암의 손녀가 헤로디아이다. 헤로데는 마리암 뿐만 아니라 몇몇 아들을 처형시켰고 왕위를 계승할 만한 왕자는 넷째 부인(말다케)에게서 난 헤로데 아르켈라오스, 헤로데 안티파스, 그리고 다섯번째 부인 소생인 헤로데 필립포스 등이 남게 되었다.

 

헤로데 대왕 사후

 

BCE 4년 헤로데 대왕은 세상을 뜰 때 예루살렘을 포함한 유대 지방은 아르켈라우스에게 안티파스에게는 갈릴레아지방, 필립포스에게는 베타니아지역(갈릴리 호수의 북쪽)을 물려주었다.

 

후계자 격인 아르켈라우스는 헤로데 대왕의 잔인함을 물려받아 유대 사람을 잔인하게 대하였다. 이에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몰래 로마 황제에게 사절단을 보내 헤로데 대왕의 아들들이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도록 간청하였고 로마 황제도 유대 왕국의 분할을 원했기 때문에 세 아들들을 왕이라는 칭호 대신 Tetrarch(영주) 라는 칭호를 내리게 된다. 이들의 꿈은 당연히 유대의 왕이 되는 거였기 때문에 서로 반목할 수 밖에 없었다.

 

잔인한 아르켈라우스는 이에 격분하여 이 사절단에 가담한 사람들과 일가족 수천을 학살하였고 이것이 문제되어 Tetrarch에서도 폐위되고 예루살렘을 포함한 아르켈라우스가 다스리던 유대 지방은 로마에서 파견한 시리아 총독의 직할 통치를 받게 된다. 예수 당시 총독은 본디오 빌라도였다. 따라서 유대 지방은 로마 총독, 헤로데 안티파스, 헤로데 필립포스 가 분할 통치하는 형국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예수를 〈유대인의 왕〉으로 부르니 통치자들은 껄끄러울 수 밖에 없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할아버지(안티파트토스)와 같이 나바테아 왕국의 공주와 결혼했었으나 이혼하고, 헤로디아와 결혼하였다. 헤로디아는 이복 형제 아리스토불로스의 딸이자 또 다른 이복 형제 헤로데 필립포스의 부인이었다. 아리스토불로스는 어머니가 헤로데 대왕의 2번째 부인인 미리암이었기 때문에 헤로디아는 하스몬 왕조의 혈통이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어머니가 헤로데 대왕의 측실이었고 부모 모두 하스몬 왕조와 관련이 없었기 때문에 정통성이 부족했던 부분을 하스몬 왕조의 피를 이어받은 헤로디아와 결혼을 통해 보완하려 한 것이다.

 

물론 헤로디아는 헤로데 안티파스의 제수이자 동시에 조카딸이었는데 원래 당시의 이스라엘에서는 사촌끼리의 결혼은 일반적이었고 근친혼은 사회적으로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형사취수제도 남아 있었다. 〈마르코,12:18~〉에 보면 부활 개념을 인정하지 않았던 사두개인들이 예수에게 형사취수로 형제들이랑 결혼한 여자가 나중에 다 같이 부활하면 누구의 부인이 되는 거냐 물어보기도 했다.

 

성서에 따르면 세례자 요한이 헤로디아와의 결혼으로 헤로데 왕을 비판했다가 감옥에 갇히고 목을 베여 죽는다.〈마르코,6:17〉 세례자 요한이 비판한 것은 근친혼이 아니었다. 비판의 주된 원인은 헤로데 필리포스가 죽어서 그의 아내를 취한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당시 헤로데 안티파스는 Tetrach였었고 헤로데 필리포스는 그런 권력이 없었다. 따라서 헤로데 안티파스는 정치적인 이유로 형제의 아내를 취했고 헤로디아의 입장에서도 권력이 없는 남편을 버리고 권력자에게로 간 거였기 때문이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Tetrach에서 헤로데 대왕처럼 유대인의 왕을 꿈꾸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살아 있는 형제의 아내와 결혼을 한 것은 모세의 율법에 어긋나기 때문이다.(신명기 15:5-6)

 

헤로데 안티파스의 첫 부인의 처가였던 나바테아 왕국이 이에 분노하여 침략하였고 이 때 굴욕적인 패비를 맛본 후 세력이 약화되었다. 이후 로마황제 칼리쿨라에 대한 반역죄로 왕위에서 쫒겨나 유배지에서 숨을 거둔다. 성서에 따르면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헤로디아와 그녀의 딸이 주요하게 개입한 것으로 나온다. 딸 이름은 요세푸스의 역사서에 살로메라고 나오며 성서에는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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